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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말기 한반도 영유를 위한 일본의 화평공작 by 契來慕愛彛吐glamorator

Good Choi 2012. 1. 13. 22:37

 

 

 

 

 

 

조선을 고수하라! - 2차 대전 말기 한반도 영유를 위한 일본의 화평공작 by 契來慕愛彛吐glamorator

 

 

 

 

 

20세기 전간기( 前幹期 ) 한민족은
일본에게 병합( 1910 )되어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의 지배를 당하였다.

 

그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식민지와 특히 그 중추부인 일본명 조선,

즉 한반도를 중시하여 그 영구한 지배를 위하여 최대한으로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아세아에서의 패권을 도모하여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잇달아 일으켜 제 2차 세계 대전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최종적으로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함에 따라

일본 식민제국은 해체되었지만 일본은 패전 직전에 이르러서까지

천황제의 유지인 국체호지( 國體護持 )와 더 나아가서는 당시 자국이 지배했던

식민지를 일부분이나마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한반도를 고수하고자 최후까지 전력을 기울였다.

 

이 장은 바로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종전외교, 소위 화평공작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서 대륙침략을 시도하고

일본, 독일, 이태리의 3국동맹을 체결( 1940. 9 )함으로서 추축국에 가담하였으며

불령 인도지나로 진주( 1941. 7 )하여 연합국, 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파국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국이 일본에 제재를 가하여 일본의 추축국 탈퇴와

만주사변 이전의 점령지 철수를 요구하자 일본의 수상 동조영기( 東條英機 )는

일본의 퇴각이 자재격감과 사기저하 및 점령지 치안, 그리고 만주, 조선 등의

식민지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개전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태평양전쟁을 개전( 1941. 12. 8 )하여

일본은 제 2차 세계 대전에 전면적으로 돌입하게 된다.

 

 

당초 일본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구주대륙의 대독전에 몰두하고 있는 연합국에 선제 공격을 가해

동남아를 점령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지구전과 지연전 및 협상으로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 )의 대의명분 하에 일본의 아세아와

대양주의 패권장악을 연합국에 기정 사실로서 승인시키는 것을 목표를 설정하였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구주에서의 추축국의 패세와 더불어

1943년 1월 남태평양에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되자 일본은 패전으로

전환되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외교에 의한 다소나마 유리한 조건으로의

강화와 전쟁의 종결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일본은 1943년 봄부터 근위문마( 近衛文磨 )의 주도 하에

일본의 황실 유지와 조선, 대만 등의 영유를 조건으로 하여 종전운동을

추진한다는 중론으로서 일본의 식량과 자원의 보급지인 조선과 대만을

고수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 12월 7일 연합국의 삼거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세계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사전 협의하여 카이로회담에서 카이로선언을 공약하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 Unconditional Surrender )과 태평양, 만주, 대만, 팽호제도 및

일본이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의 일본의 축출과 일본열도 - 본주( 本州 ), 구주( 九州 ),

사국( 四國 ), 북해도( 北海道 ) -로의 주권제한, 그리고 한반도의 독립에 관하여 공표하자

일본은 무조건항복과 모든 점거지영토 반환 요구에 강력히 반대하고 끈질기게 저항하였으며

전황이 악화되어감에 따라 모든 외교적 노선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화평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6월 사이판에서 일본군이 전멸되자 강경파 동조내각이 도각하고

소기국소( 小磯國昭 ) 내각이 들어섬으로서 본격적인 화평공작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본격 전개된 중국과의 화평공작에서 일본은 1944년 8월 중국에서의

영미군의 철수와 만주국의 존속으로서 만주의 중립화와 현상유지로서

전전의 식민지 확보를 의도하였다.

 

한편 대독전선에서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아가던 소련도 태평양전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2차 대전 중 추축국 일본은 원칙적으로는 소련과의 적대국이었으매

일본이 독소전쟁에 불개입을 묵시하였던 태도로 사실상 중립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전시 일본의 유일한 외교대상 연합국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배후의 가상적국 일본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소련의 극동지역에 인접해있는 현 일본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

화태도( 樺太島 ), 천도열도( 千島列島 ), 만주, 조선 -이 기타 연합국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본은 8월 남화태와 북만주의 양도, 남만주의 비무장화를

조건으로 소련과의 관계개선과 소련을 통한 중국 연안정권과의 중재를

목표로 한 화평공작을 생각한다.

 

전황이 날로 악화되어감에 따라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정책도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1944년 8월 8일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는 조선에 대해서는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철저히 도모하여 제국신민의 권리 의무 부여 및

독립운동의 준열한 탄압을 결정함으로서 조선고수론을 명백히 표명하였다.

 

9월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재차 대소련 타협안으로 만주의 중국반환,

남화태의 소련반환 및 더 나아가 심지어 조선의 독립 중립과 노일전쟁

이전으로의 회귀까지 고려하였지만 결국 9월 5일 만주국과 식민지의

현상불변을 결의하게 되어 9월 15일 제안은 폐기되고 만다.

 

9월달에는 서전을 통하여 화평공작이 시도되었다.

일본은 비공식적으로 바게( Bagge ) 주일 서전공사에게

전전의 조선과 대만을 포함하지 않는 전쟁 중의 점령지 일체와

만주국의 포기를 타전하였으나 미국에 의하여 묵살되고 만다.

 

1945년 1월 초에는 교황국을 통하여 미국에게 화평조건으로

향항, 해남도 영유, 비률빈의 독립과 극동에서의 일본의 특권적 지위를

요구하였으나 교황국은 일본의 전전 이전으로의 회귀라는 최소한의 요구도

영미측의 고려와는 거리가 멀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였다.

 

2월 4일~15일에 얄타회담이 이루어져 테헤란회담에서의 결정이

재확인되어 소련이 독일 항복 2~3개월 내에 대일전에 참전하고

그 대가로 노일전쟁의 실지 남화태 및 천도열도를 소련에 귀속시킨다는

협정이 맺어졌다.

 

그러나 소련의 대일참전은 지지부진하였고

3월 말 독일의 패망에 직면함에 따라 육군대신 아남유기( 阿南惟幾 )와

외무대신 동향무덕( 東鄕茂德 )을 중심으로 일본은 재차 소련을 통하여

연합국과 화평을 추구하는 대소 화평외교 정책을 고려하기 시작하여

전황이 계속 악화됨에 따라 일본은 대소 화평공작에 가장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또한 4월에서 6월 동안에는

스위스에서 미국과 접촉하여 천황의 보존,

조선과 대만의 영유 화평공작을 전개하였지만

역시 조선, 대만의 영유 불가로 인하여 무산되었고

 

결국 이러한 외교적, 그리고 군사적 악화로 인하여

4월 9일 일본육군은 제국육해군작전계획대강, 결호작전으로

일본의 일억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상륙하는 적을 격퇴시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시도하겠다는 목적 하에 본토결전을 준비하게 된다.

 

5월 6일에는 포도아를 통하여

미국에 무조건항복의 불가를 전제하고 전쟁 중의 모든 정복지는

포기하겠지만 전전의 영토는 유지하려는 소망을 종용하였다가 또다시 묵살되었다.

 

5월 8일 독일이 항복함에 따라 일본의 패망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일본은 ' 무조건항복은 카이로 회담의 표명된 바

조선과 대만까지 포함되므로 최후까지 항전하여야 한다 '는 결의로

구 식민지를 최후까지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절망적인 전황과 더불어 더 나아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게 되자 청일전쟁의 태세로 돌아가 만주, 요동반도,

남화태, 대만, 천도열도, 조선까지 식민지를 모두 과감하게 포기해서라도

대소전을 회피하고 국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기도 하였다.

 

중국, 스위스, 서전, 교황국에서의 화평공작이

모두 성과를 거두지 못함에 따라 일본의 입지는 더욱 절망적이 되었다.

결국 그나마 소련밖에 교섭대상이 없었으며 미소대치 하에서 어부지리를

기대한 군부의 의도 하에 일본은 대소 화평공작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5월 14일 일본은 최고전쟁지도회의 결안에서

소련의 대일참전 예방과 연합국 이간을 목표로 소련에게 남화태 반환과

어업권 포기, 경진( 津輕 )해협 개방, 북만주 전 철도 양도, 여순과 대련 조차,

더 나아가 천도열도 북반 양도로서 노일전쟁으로의 복귀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단 조선은 일본에게 유보하며 남만주를 중립지대화함으로서

조선을 계속 고수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조차도 반발이 완강하여

군부의 일각에서는 일본의 식량사정, 전후 극동의 혼란 예방,

만주와 중국 등의 무력점령지역과는 다른 국제법상 조약으로 획득한

영토권으로서 조선과 대만의 포기가 불가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5월 16일에는 재차 서전의 바게 공사를 통하여

미국에 조선과 대만의 일본 영유를 전달하였다가 역시 묵살되었다.

 

일본은 동월 일미단독강화를 기도한 대미 화평공작에서도

일본 주권의 불변경, 해도국가 일본의 상황을 고려한 상선대의 현상유보,

일본의 근대화의 수혜지이자 일본인의 필수 생활지를 이유로

대만과 조선의 영유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의 결정인

한반도 독립에 위배되는 마지막 조건으로 인하여 이를 묵살해버리고 말았다.

 

조선과 대만 영유를 지침으로 한

6월 3일~29일의 광전( 廣田 )-마리크 회담에서도

일본은 이미 대일참전을 결심한 소련에 의하여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 당시 일본은 대소교섭안에서

' 조선과 대만은 국제법상의 조약에 의하여 영토권을 획득한 것 '으로

주장하였는데 6월 30일 최종적으로 완성하여 제출된 일소교섭요령에서는

대만이 제외되고 조선만을 명기하여 조선만은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후 일본은 재차 7월 11일 조선과 대만의 영유를 조건으로 교섭을 하였지만

종국에는 실패하였으며 이로써 소련의 대일참전은 결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격렬한 군사적 저항과 아울러 음양으로 진행된

끈덕진 화평공작은 이미 일본측의 요구사항을 계속 탐지한 미국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미 여러차례 전개된 치열한 전투로 일본 본토 상륙시의

대피해를 우려하고 있었으며 조속한 종전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의 항복 직후인 5월 9일 미 합동참모본부( JCS )는

일본 본토 비점령과 한반도, 천도열도, 대만의 일본 영유를 검토하였었고

5월 28일에는 전 미 대통령 후버가 트루먼 대통령과 면담하여 일본정부 불파괴와

한반도과 대만의 일본 잔류라는 종건조건을 완화하는 연합국 공동성명을

내기까지 하였으며 이를 6월 1일 참모들에게 논의하게 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변화는 일본의 군사적, 외교적 항거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철저한 패퇴로 전후 극동에서 소련을 견제할 세력이 제거되면

소련의 유일 패권을 조장한다는 불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벌어진 논의 결과 6월 4일 전략정책단( 戰略政策團 ) 링컨( Lincoln ) 단장은

미국의 대일 조치와는 무관하게 소련은 극동에서 우월해질 것이며

카이로회담과 얄타회담으로 한반도와 대만의 일본 양여는 호응이 불가하다고

답변하였으며 마샬 총장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럼에도 합동참모본부는 재차 6월 8일 한반도와 천도열도를

일본이 영유한다는 조건의 종전제안을 예상하고 이를 항복조건으로 승인하기까지 한다.

 

6월 11일 스팀슨 전쟁장관은 후버의 한반도, 대만의 일본 영유안을

참모들에게 논평을 재청하였으며 링컨 전략정책단장과 마샬 총장은

6월 14일 카이로회담 및 중국과 소련의 군사적 이유로 일본의 한반도와 대만 영유는

수락 불가라고 회답한다.

 

결국 이 회답은 포츠담회담에 기초되었으며

그리고 7월에는 미국과의 협의로 인한 중국이 천황제존속,

일본군의 전 해외철병 및 조선, 대만, 화태 양도 및 연합국의 협의종료로

차후변경의 요지없음이라는 중국측의 답변으로 일본의 화평공작은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7월 26일 포츠담회담의 포츠담선언 제 8항에서

'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본주, 북해도, 구주, 사국과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라고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한반도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앗싸~ )

 

그리고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묵살함에 따라

마침내 광도( 廣島 )와 장기( 長崎 )에 원자폭탄이 투하( 9.6, 8.9 )되고

소련이 참전( 8.9 )하여 대대적으로 공격을 가함으로서

드디어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 8.10 )하고 무조건 항복( 8.15 )하여

2차 대전은 종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조선에게서 미련을 떨치지 못하였다.

일본 항복의 날 일본정치가 폐원희중랑( 幣原喜重郞 )은 천황의 패전 선언을 듣고

종전선후책을 작성하여 조선을 일본이 재수복해야 할 실지로 인식하는 행동을 취하였으며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강촌녕차( 岡村寧次 )는 본국 군수뇌부에게

" 일본의 영토를 본토로만 국한한다면 일본의 인구가 3천만 명이었을 때로 되돌아가라는 것 "

이라며 " 지금은 인구가 7천만 명이니 반드시 조선과 대만을 소유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다 "

라고 최후 호소 전문을 보내었고

 

8월 17일에는 일본 조선군이 관동군에게

" 조선은 여전히 황토( 皇土 )임을 깊이 새겨서 가벼이 이를 버리는 것과 같은

언동을 취하거나 또는 제 3자에게 그와 같은 인상을 주지 않도록 엄히 주의 "를

제시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연합군 진주시까지 조선을 통치한다 공언하였고

심지어 연합군 진주 이전과 이후에도 당분간이나마 일본의 통치권을

잔존시키려고 막후 공작을 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자국의 조선통치권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체결된 1952년에 법적으로 종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식민제국을 건설하고

그 식민지를 발판으로 하여 아세아와 대양주의 패권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한 목적에서 추구한 일본의 외교공작은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강경일변도에서 타협으로, 패전에 직면하여서는 건질 수 있는 것은 다 건진다는

화평공작으로 변해갔다.

 

그리하여 일본은 국제법상의 합법영토라는 이유로,

근대화의 수혜자라는 이유로, 자국민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자원을 이유로 전전 식민지를,

그 중에서도 실지탈환의 본국이 존재하는 남화태( 소련 ), 천도( " ), 만주( 중국 ), 대만( " ),

팽호( " )와는 달리 의지할 본국이 없었던 한반도라도 최후까지 고수하고자

패전 그 순간까지 집요한 화평공작을, 무의미한 전쟁을 끌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결국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여

모든 식민지를 상실하고 근대 이전의 섬나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민족은 35년 11개월 동안의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현되지도 못하였던

일본의 한반도 고수 집착으로 말미암아 연장된 전쟁은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군의 참전 및 한반도 진주를 초래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이루어진 미소의 한반도 진주는 38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분단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38선 분단의 주동자는

한반도의 일본영위를 반대했던 전략정책단장 링컨 준장이었다. )

 

 

 

그리하여 한반도는 남반부는 대한민국( 한국 )으로

북반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 )으로 분단된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후간기( 後幹期 ) 한민족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역사 겔러리 契來慕愛彛吐glamorator 님

http://gall.dcinside.com/list.php?id=history&no=272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