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공간/세계정세

9.11 테러와 이라크전(上) by 엑스트라1

Good Choi 2011. 12. 8. 19:16

 

 

 

 

 

 

지인께서 만드신 자료입니다.

 

여러개로 나뉘어진 PPT 자료를 

제가 읽기만 할 목적으로 편집하다 보니

편집의 한계로 연결이 약간 어색하더라도 양해바랍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알카에다, 걸프전(1차 이라크전),

이라크전(2차 이라크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내용도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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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원리주의


1-0.모든 것은 사우디에서 시작되었다.

 

 


  세계 지도를 들여다 보자. 인도 서북쪽부터 시작하여

위로는 그리스 옆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서로는 이집트와 수단, 넓게는

대서양까지 닿는 북아프리카의 해안지대까지를 우리는 '중동'이라고 부른다.

 

그 중동세계의 한 가운데 아라비아 반도가 있다.

광활한 넓이의 반도면서도 90%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불모의 땅인 이 곳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모든 사건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1-1. 아라비아 반도

  아라비아 반도부터 시나이반도, 이라크, 요르단에까지 닿는

사막지대는 많은 인구가 정착해서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는 땅이 아니다.

사람들은 사막에 흩뿌려진 오아시스에 의존해 근근이 살아갔다.

땅이 메말라 농사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고, 필연적으로 목축이 주된 산업이 되었다.

 

  물과 풀이 드문 사막에서 가축을 친다는 것은

곧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생존경쟁이었다.

물을 둘러싼 싸움은 곧 죽고 죽이는 혈투가 되었고,

사람들은 혈연단위로 단단히 뭉쳐 저항했다.

 

혈연의 결속은 곧 생존에 직결된 문제가 되었다.

가문은 곧 권위있는 장로와 가장들을 중심으로 짜여진 조직이 되었다.

그 권위에 도전하는자는 사막에 내쳐졌다.


- 척박한 사막 환경하에서 권위주의, 미신중시, 남녀차별적인 아랍 관습법이 만들어짐.


- 6세기, 선지자 마호메트의 지도하에 만인평등, 미신철폐, 남녀차별 철폐를 내세운 이슬람교 탄생

- 이슬람, 중동을 석권. 하지만 정작 이슬람의 발상지 아라비아반도는 이슬람의 중심에서 배제


- 사실상 방치되다시피 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이전의 부족사회와 미신숭배가 다시 부활


- 그리고 1000년이 지난 후...

 

 

 

1-2. 와하비


- 1700년대 중반, 아라비아 반도에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합이라는 이슬람 율법학자가 등장


- 와합은 미신을 타파하고 오로지 코란에 입각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와하비즘'을 주창함.


- 와합과 그의 추종자들은 와하비 주의에 입각하여

우상과 사당을 때려부수다가 아라비아의 부족들에게 쫒기는 신세가 됨


- 그런 와합을, 니자드의 부족인 '사우드 가문'이 받아들임. 사우드 가문은

와합과 인척관계를 맺고 와하비 주의를 내세워 주변 부족들을 격파하고

오스만 투르크에게서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탈환함.

 

 

1-3. 포기를 모르는 사우드 가문

 

이슬람의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빼앗겼다는데 놀란

오스만 투르크는 군대를 보내 사우드 가문을 무너트리고 성지를 되찾는다.

하지만 사우드 가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두 번째 사우드  왕국을 일으키지만

이마저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두번이나 멸족의 위기를 겪고도 포기하지 않은 사우드 가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우드의 마지막 후예, '압둘 아지즈'는 다시금 군대를 일으켰다.


- 성지를 빼앗겼다는데 격분한 오스만 투르크는

군대를 보내 사우드 가문을 박살내고 성지를 재탈환함


- 포기하지 않은 사우드 가문은 다시금 거병하여 제 2 사우드 군주국을 세움

- 제 2 사우드 군주국은 라이벌인 라시드 군주국에게 패배함


-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사우드 가문의 후예, '압둘 아지즈'는 다시금 거병함.


- 압둘 아지즈는 휘하에 와하비즘로 철저하게 무장한 군대인

'이슬람 형제단'을 앞세워 주변 부족들을 평정함.


-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측에 붙은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던 영국은 사우드 가문을 지원함


- 사우드 가문의 아랍 군대와 영국군은

시리아까지 진공하여 오스만 투르크를 항복시킴.

 

 

1-4. 이슬람 형제단. 세속주의와 원리주의의 탄생.


- 혈연말곤 믿을게 없었던 아라비아 부족 사회에서,

종교적인 믿음으로 똘똘뭉친 이슬람 형제단은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를 평정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 하지만 사우드 가문은 정복한 지역을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다른 부족의 종교나 관습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 이슬람 형제단은 이에 극렬히 반발하여 다른 부족들과 마찰을 빚고,

특히 영국과 같은 서구문명에 적대감을 드러내며, 사우드 가문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영국의 중동 식민지를 공격했다.


-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우드 왕은 자신의 군대를 소집해

이슬람 형제단과 전쟁을 벌였다.(1929) 이 전쟁에서 국왕군의 기관총 앞에

이슬람 형제단은 궤멸당하고 만다. 하지만 와하비즘을 건국 이념으로 삼아왔던

사우드 군주국(이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념적으로 보면 옳은 것은 형제단이었다.

 

- 이슬람 형제단이 국왕군의 기관총에 궤멸당한 순간, 이슬람 세계에는 대립되는

두개의 사상이 태어난다. "순수한 이슬람을 보호하기 위해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를 만들어야한다."는 '원리주의'와, "통치를 위해서는 순수한 이슬람을

어느정도 포기할 수 있다."는 '세속주의'가 그것이다.

 

- 이슬람 형제단을 몰살시킨 사우디 왕이었지만, 자기들의 건국이념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대대적으로 돈을 풀어 이슬람

사원을 짓고, 이슬람 율법을 바로세우고, 이슬람 대학을 지어 와하비즘 사상을

가르쳤다. 사우디 왕가는 자신들의 목을 겨눈 와하비즘 사상을 떨쳐내는 대신,

돈으로 구워삶기로 한 것이다.


- 이 떄문에 와하비즘, 즉 이슬람 원리주의는 계속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사우디 왕가가 뿌린 돈을 잔뜩 먹은 이슬람 학자들은

사우디 왕가의 이익과 근본주의 이슬람 이념이 충돌할때마다 자신들의 이념을

굽히고 들어갔지만,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배운 학문 그대로 행동하고자 했다.

 

 

* 이슬람 원리주의 (근본주의)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원래의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운동

일반적으로 이슬람 과격 단체나 폭력주의조직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

이슬람 교도 간에 대립을 초래하는 모든 외세의 이념은 악이라고 간주.

 

사실 원리주의는 이슬람에서 쓰는 용어가 아님.

언론에서 기독교 근본주의 혹은 원리주의라는 용어에서 따온 것.

 


 

* 싸이드 꾸틉(Sayyid Qutb, 1906~1966)

 


이슬람 원리주의 이론과 행동철학을

다듬고 체계화, 이정표를 제시.

 

‘이슬람 이데올로기화’와 ‘이슬람 혁명’이론 주창.

죽음 이후 급진적 원리주의가 급속도로 확산.

- 걸프전 이후 무차별적 테러리즘의 발생을 야기

 

 

 

 

* 이슬람은 위험한가?

 

한국에선 이슬람이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을 근간으로 삼은 야만적인

종교라고 보는 기독교/보수 계통의 시각과 "세금만 내면 종교자유를 인정해줬던

관용의 종교"라는 진보 계통의 시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면 어느쪽의

시각이 옳은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슬람은 위험하다. 이슬람은 만들어질 당대의 기준으로는

대단히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종교였지만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게다가 창시자 마호메트 사후에, 이슬람은 초기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마호메트가 그렇게 떨쳐내고자 싶어했던 후진적인 아랍 관습법을 수용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

기독교의 성경도 온통 남녀차별, 인종차별, 불합리한 관습으로 얼룩져있었고,

후대의 기독교 교회도 이슬람만큼 온갖 미신과 관습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서구의 기독교는 근대에 들어와 과학과 학문의 도전을 받아서

그 힘이 크게 약화되어 일개 종교로 주저앉은 반면, 이슬람은 아직도

종교, 정치, 생활에 실질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단 점에서 아주 크게 다르다.

성경에서 간음한자를 돌로 쳐죽이란 구절은 단순히 옛날 관용구일 뿐이지만

이슬람에서는 그 표현이 실제 법정에서 통용되는 법조문이다.


  이슬람이 위험한 것은 "한손엔 칼, 한손엔 코란"을 들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처럼 과학과 이성의 호된 공격을 받아 약화되지 않았단 점 때문이다.

즉, 근본주의 이슬람이 득세하는 국가에서 이슬람은 종교일뿐만 아니라

법체계이고, 생활윤리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이슬람을 구분하는 두개의 요소, 시아파 vs 수니파, 세속주의 vs 근본주의

 

 

 우리는 흔히 '아랍 제국', '중동' 이런식으로 중동지역을 뭉뚱그려 얘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중동지역 국가간의 대립은 한-중-일 이상으로 치열하다.

왜 다들 이슬람을 믿는데 이렇게 다투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믿는

이슬람의 종파와, 그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아파와 수니파는 이슬람의 대립되는 두 종파이다.

 

시아파는 선지자 마호메트의 혈통만이 이슬람의 칼리프(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권력싸움에서 패배한 4대 칼리프이자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를 정신적 지도자로 여긴다. 시아파 무슬림은 이슬람세계의

20% 정도를 차지하며, 이란, 이라크, 바레인에서 다수파이다.
 

수니파는 혈통과 상관없이 권력을 잡은 칼리프(우마이야 왕조)를

추종한 종파로, 이슬람 세계의 80%를 차지하는 다수파이다. 이들은

종주국이라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집트, 터키, 요르단,

시리아에서 다수파이다.

 

여기에 세속주의와 근본주의가 또 하나의 척도가 된다.

더더욱 골치 아픈 것은, 사회 지도층의 종교와 대다수 국민의 종교가

다른 국가가 있으며, 민족끼리도 대립이 있단 것이다.

이집트인, 투르크인(터키), 아랍인, 페르시아인(이란), 나라없는 소수민족

쿠르드족까지... 이러니 중동엔 바람잘 날이 없다.

 

 

*종교와 사상으로 보는 중동국가들
(국가명-지도층 종교-국민 종교-사상)

 

사우디아라비아-수니-수니-근본주의


이집트-수니-수니-세속주의

 

터키-수니-수니-세속주의

 

요르단-수니-수니-세속주의

 

시리아-시아-수니-세속주의

 

이란-시아-시아-근본주의

 

바레인-수니-시아-세속주의

 

이라크-수니와 시아가 대립 중-세속주의와 근본주의가 대립중

 

레바논-수니와 시아와 기독교와 드루즈파(이슬람 이단종파)가 대립 중

-세속주의와 근본주의가 대립중

 

쿠르드족-나라가 없이 2500만명의 민족이

터키-시리아-이라크-이란에 걸쳐있으며, 그 모든 나라의 정부와 대립 중

 

 

 

 

 

2. 냉전, 테러의 국영화.

 

2-0 테러리즘이란?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적인 공포 수단을 이용하는 주의 또는 정책

 

* 1937년 국제연맹

‘테러리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회의’에서 정한 테러리즘의 정의

 

- 한 국가에 대하여 직접적인 범죄행위를 가하거나,

일반인이나 군중들의 마음 속에 공포심을 일으키는 것

 

- 국가원수의 배우자에 대한 살상, 공공시설 파괴 등을 테러리즘에 포함

 

 

* 테러리즘의 특징

 

테러리즘의 4가지 공통점

 

- 정치적 목적이나 동기가 있음
- 폭력의 사용이나 위협이 따름
- 심리적 충격과 공포심을 야기
- 소기의 목표나 요구를 관철시킴

 

*오늘날 테러 공격 형태의 특성 3가지

폭탄공격, 하이재킹, 인질납치

 

 


2-1. 냉전 시기의 테러


-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개편된다.

양측은 서로를 약화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그 중 하나가 테러였다.

 

- 냉전시기엔 국가 정보기관에 의해 제3세계에서 수많은 테러가 자행된다.

그 이외에도 이념에 경도된 좌익 테러단체들이 서방세계에서 활개를 치는데,

대표적으로 서독의 비더마인호프-강,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일본의 적군파 등이 있다.

 

 

 


- 이념을 앞세운 테러리스트 이외에도 민족해방을 꿈꾸는 테러리스트들도

국제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북아일랜드 의 IRA(아일랜드 해방군),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바스크 민족해방운동, 팔레스타인의 PLA 등이 대표적이다.


- 냉전시기엔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테러가 분쟁지역을 벗어나

국제화된 것이 특징이다. 일본의 적군파가 독일에서, IRA가 이스라엘에서

테러를 벌이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테러조직들은 서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IRA와 PLA는 테러기술과 무기를 다른 테러단체에 지원해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2-2. 세속주의의 전성기


-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아랍-중동 식민지들은

차례차례 독립해서 떨어져나가게 된다. 이집트, 이라크, 이란, 시리아,

레바논, 예멘 등이 식민지에서 독립하게 된다.


-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는 석유와 수에즈운하라는 결정적인 이권이

걸린 중동지방에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문에

국력이 예전같지 않던 영-프는 더 이상 중동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은 새로운 패권국인 미국이 그들의 중동지배를 도와주리라 예상했지만,

미국은 늙은 제국들이 자기들한테 빌린 돈으로 식민지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영-프의 세력이 줄어들자, 영-프의 지원을 받고 있던

신생 아랍 독립국들의 정부들은 차례차례 무너지게 된다. 이들을 무너트린 것은

식민지 시절에 서구식으로 교육받고, 민족주의 정신에 감명받은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를 무너트린 이들 청년 장교들은 낡은 이슬람 근본주의 대신

민족주의에 기반한 세속주의를 국가의 기반으로 삼게 된다.


- 요르단과 이란의 왕들은 이러한 도전을 버텨냈다.

대신 이들은 근본주의를 포기하고 서구의 기술과 사상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 이미 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 터키 공화국으로 거듭났던

터키는 군부의 독재하에 세속주의가 완전히 뿌리내린 상태였다.


-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전히 근본주의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사우디 왕가는 미국과 굳건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 바야흐로 세속주의의 전성기였다. 이집트의 나세르,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군부 독재체제를 수립했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증강시켰다. 이들이 국가의 이념으로 삼은 것은 "모든 아랍이 단결해야한다."는

'범 아랍주의'였다. 그리고 그 범 아랍주의의 목표물이 된 것이 이스라엘이었다.


- 세속주의 군사 독재정권에게 원리주의자들은 골칫거리였다. 끊임없이 대중을

선동하고 소요를 일으키는 원리주의자들을, 독재자들은 잔인하게 짓밟았다.


- 1950~70년대 사이 원리주의자 세력은 탄압 속에 신음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약진한 것이 PLA같은 민족주의 테러조직, 중동국가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길러낸 국가적 테러조직들이었다.

 

 

 

 

2-3. 아프간 전쟁


- '범 아랍주의',  '이스라엘 척결'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세속주의 군사 독재정권은 70년대를 거치며 위기를 맞는다.

단결된 아랍 앞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줄 알았던 이스라엘은 건재했고,

오랜 독재에 신음한 국민들은 점점 독재정권에서 등을 돌렸다.

이러한 풍조를 타고 중동국가들 사이에는 원리주의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 1979년은 원리주의의 해였다. 이란에서는 세속주의 친미정권의 선두주자였던

레자 샤 팔레비가 시아파 원리주의자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군에 무너졌다.

이슬람 최고의 성지인 메카는 수니파 원리주이자 주하이만 알 우타이비가 이끄는

수백명의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며칠간 점령되었다.


-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세속주의를 구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1979년 아프간을 침공하여 소련-아프간 전쟁을 일으키는데

(소련이 아프간에 새로 수립된 공산주의 정권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위성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3만의 병력으로 1979년 아프간 침공)

 

미국은 아프간을 소련판 베트남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수단으로 택한 것이 '지하드(성전)'이었다.

‘지하드’를 빌미로 원리주의자들을 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아프간으로 유인

 

- 미국의 지원하에, 사우디를 위시한 미국의 아랍 동맹국들은

자국의 원리주의자들을 당장 성전이 벌어지는 전쟁터 아프간으로 수출하게 된다.

요컨데 "지하드를 하고 싶으면 다른 나라에서 하시요." 전략이었다.

 

 

*지하드(성전)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 명시된 단어로,

이슬람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성스런 전쟁.

흔히 이슬람교의 옹호와 전파를 위해 ‘이교도에 대해 벌이는 전쟁’이란

개념으로 알려져 있음.

 

본래는 이슬람교도가 위기에 처했을 때 벌이는 방위적 성격의 투쟁.

지하드의 기치를 내걸고 많은 이슬람교 단체들이 게릴라전/테러  행위 자행

 

 

 


2-4. 원리주의 부활


- 1985년을 기점으로 소련은 붕괴 초읽기에 들어갔고,

아프간전에서 경력을 쌓은 원리주의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 소련의 약화는 중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중동의 친미국가들은

더 이상 무신론을 믿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소리높여 주장할 수 없게 되었고,

친소국가들은 소련의 지원을 바랄 수 없게 되었다.


- 고향으로 돌아온 원리주의 전사들은 아프간전쟁에서 미국이 가르쳐준

전쟁의 기술을 가지고 고향의 세속주의 독재정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1981년,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암살, 1982년, 시리아의 하마시 분쟁 등은

원리주의자 조직이 독재정권을 정면공격하기 시작한 신호탄과도 같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독재정권들은 원리주의자들과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시리아의 알아사드 독재정권은 하마시에서 3만명을 죽여없앴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원리주의자들을 소탕했다.


- 하지만 이때까지도 원리주의자들의 적은

자기나라의 독재정권이었지 미국이 아니었다.

 

 

 

 

 

 

3. 탈냉전, 오사마 빈 라덴

 

 

3-1. 탈냉전


 

- 1990년, 소련은 완전히 붕괴하고 미국은 초강대국이 되었다.

 

 

- 초강대국 미국은 막강한 군대와 자본을 휘몰아

전세계에 영향력을 확장해나갔다.

 

 

 

 

3-2. 오사마 빈 라덴과 사우디 아라비아

 

 

slide. 1

 

*사우디 아라비아

원리주의와 세속주의의 갈등 상황, 미국의 굳건한 동맹국

 

사우디 아라비아는 온갖 모순이 들끓는 국가였다.

20세기 초, 사우드 가문은 이슬람 원리주의로 단단히 무장한

군대를 앞세워 오스만 투르크를 몰아내고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광대한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정복이 끝나고 통치가 시작되자, 이교도와 외국문물을 배척하고,

철저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통치하자고 아우성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사우디 왕가에게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결국 사우디 왕가는 극단적인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숙청해버리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왕가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사우디의 건국 이념이었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왕가의 폭압적인 통치를

계속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slide.2  


 사우디 왕가는 미국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혼갖 호화판 생활을 벌이면서도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사우디의 사회체제는 온통 억압과 이슬람 원리주의로 도배되어 있었다.

사우디엔 의회도, 언론도, 헌법도 없다. 여자는 일체의 공적활동과,

심지어 운전마저도 금지되어 있다. 교육의 대부분은 이슬람 종교 교육이고,

대학생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원리주의를 전공으로 택한다.   

 

 

 물론 사우디 왕가는 자국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후원하는 대신

몇가지 단서 조항을 단다. "이슬람 원리주의는 좋지만, 왕가의 부정부패나

호화판 사치, 미국과의 동맹같은 '이슬람답지 못한 일'에는 눈을 감아라"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원리주의를 배운 사우디 학생들 중

일부는 왕가와 유착한 '타락한 이슬람'을 버리고 '진짜 이슬람 원리주의'를

외치며 반 서방, 반 왕가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9년, 메카의 사원을 점령하여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주하이만

알 우타이비가 그랬고, 오사마 빈 라덴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slide 3.

 

 

* 오사마 빈 라덴

 

 

 

 

사우디 정통파 원리주의자

국내 명문 ‘킹 아지즈’ 대학에서 수학
종교에  심취한 원리주의자

 

지하드 참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무자헤딘 활동에 투신 – 88년 알 카에다 창설
아프간 항쟁의 영웅

 

 

 


 오사마 빈라덴은 1957년, 사우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많은 사우디의 부유층들은 미국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오로지 사우디에서 정통파  교육을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경영학, 행정학, 토목 공학들을 배워

그의 아버지가 세운 기업을 이어받았다. 17살에 첫 결혼을 한 이후엔

여러명의 부인과 자녀를 두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대학교 시절부터 계속 이슬람 종교에 향해 있었다.

 

 

 

 

 


3-3.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간 전쟁

 


slide 1.

 

 1979년, 대학을 졸업한 빈라덴은 당시 많은 사우디의 원리주의자들처럼

아프간 전쟁에 이슬람 전사로 참전했다. 그 곳에서 그는 주변의 여러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이슬람과 반미-반이스라엘 사상, 그리고 군사전술 등을 배웠다.

 

 1984년, 그는 상속받은 재산으로 파키스탄에 아프간 전쟁에 참여하려는

이슬람 전사들을 위한 훈련캠프를 세웠다. 이 캠프를 운영하면서, 그는 자신과

뜻이 맞는 동료를 모으고, 무장 테러 조직을 운영하는 노하우를 습득했다.

 

 1988년, 그는 막바지에 달한 아프간전 이후의 지하드(성전)을 위해

범아랍세계의 원리주의 전사들을 모은 무장 조직을 만든다.

그 조직의 이름이 바로 알 카에다였다.

 

 1990년, 그는 성전의 영웅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모국 사우디 아라비아로 돌아온다.

 

 

 

 

3-4. 걸프전

 

이라크의 수니파 세속주의를 표방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시아파 원리주의를 표방한 이란의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가 소수 수니파가

다수 시아파를 억누르고 있는 이라크에 시아파 원리주의를 수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1980년, 이란을 침공하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같은 수니파 국가들은

이라크를 지원헀지만 전쟁은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10년에 걸친 싸움 끝에

이라크는 경제만 피폐해진채로 전쟁을 끝낼 수 밖에 없었다.
 
  산업기반이 무너진 이라크에게는 석유 수출만이 유일한 생명줄이었다.

하지만 이웃의 친미파 국가 쿠웨이트는 자꾸 석유생산을 늘려 국제 유가를

떨어트렸고, 이는 고스란히 이라크의 손해로 돌아왔다.

 

 

이를 보다못한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3시간 만에 수도를 점령한다. 이에 국제유가는 단숨에 2배로 뛰어올랐고,

전세계 국가들은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으로 이라크를 규탄하고,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라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미국은 영국, 프랑스 같은 유럽 동맹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같은 중동국가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결성하여 이라크를

무력으로 굴복시킬 것을 선언한다.

 

우선 미국은 신속대응군을 파병하여 이라크에 붙어있는

사우디 국경을 방어하는 사막의 방패 작전을 실행하는 한편,

전 세계의 미군을 사우디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으로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을 결성.

- 미국은 사우디를 보호하기 위한 ‘사막의 방패’ 작전을 시작

- 이라크를 공격하고, 쿠웨이트를 해방시킬

‘사막의 폭풍’작전을 위해 90일간 70만명의 다국적군을 사우디에 집결시킴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은 이라크를 격퇴하기 위한

‘사막의 폭풍’작전을 시작했다. 수많은 전폭기와 미사일,

스텔스기가 폭격을 시작했고, 70만명의 다국적군 지상군이 진격하여

100시간만에 이라크군을 궤멸상태로 몰아넣었다.

 

이후 이라크군은 6주만에 55만명에 달하는 인명을 잃고 항복한다.

다국적군의 손실은 300명에 불과했다.

 

 

*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은 이라크 영내로 진공을 개시.
막강한 첨단무기와 70만 대군을 앞세운 다국적군은 100시간만에 이라크군을 궤멸시킴.
이라크는 55만명에 이르는 인명을 잃고 6주 만에 쿠웨이트에서 철수.

 

 


slide 5.


 걸프전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 전쟁이 빈라덴과 알 카에다에게 있어선 큰 전환점이 된다.

 

 이전까지 빈라덴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적은 사담 후세인같은

세속주의 정권이었다. 물론 그들은 이스라엘과 미국도 극렬히 증오했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직접 겨냥하여 테러를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사우디를 이라크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미국의 군대가

성지가 있는 나라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면서 모든게 뒤틀렸다.

빈라덴은 사우디 왕과 국방장관 앞에서 이교도 군대를 성지에

들이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사우디 왕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빈라덴은 공개적으로 미국과 사우디 왕정을 비난하고,

미국과 유럽 본토를 상대로 테러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